아카데미 각본상과 골든 글로브 각본상을 휩쓴 영화 <그녀 (Her)>는 인공지능과 인간의 사랑을 그리고 있다. AI와 인간의 관계에 대한 글에서 자주 인용되는 이 영화는 AI 기술에 대한 로르샤흐 검사(Rorschach Test, 스위스 정신의학자인 로르샤흐에 의해 개발된 심리진단검사의 일종)인 셈이다. 사실 AI와 사랑에 빠질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인간과 인공지능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문제가 아닌, AI 기술에 대한 우리의 인식, 더 구체적으로는 AI에 대한 사회 구성원들의 생각을 어디까지 인정하고 존중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가깝다.
이제는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한 논의를 시작하고 사회적 담론을 형성해야 할 때다. 왜냐하면, 필자가 저서 <AI 소사이어티>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우리는 이미 AI 소사이어티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여러분이 아직도 “AI와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내 삶과 관련 없는 시답잖은 토론 주제 정도로 여 긴다면, 아마도 여러분은 아직 ‘AI 소사이어티’에 편입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 다가온 AI 소사이어티는 인류가 수렵 사회, 농경 사회, 산업 사회, 정보 사회에 이어 겪게 된 다섯 번째 사회다.수렵 사회는 인간의 신체 능력과 서로에 대한 배려에 크게 의존 하는 사회였고, 농경 사회는 토지가 곧 생명이었다. 산업 사회는 대량 생산과 규격화가 가능해지며 자본과 노동력 쟁탈전이 벌어졌던 시대였고, 정보 사회는 'www'로상징되는 정보 혁명이 일어난 사회다. 그리고 다섯 번째 사회인 AI 소사이어티는 AI가 전기만큼이나 흔한 기술로 자리 잡은 사회다. AI 소사이어티에서는 연령이나 성별, 지역, 언어의 차이와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이 AI가 적용된 다양한 서비스와 상품을 누리며, 지능이 높은 기계와 긴밀 하게 협업하게 된다. (책에서는 이러한 사회적 모습을 ‘연결(wire)’, ‘협업(with)’, ‘확장(widen)’이라는 3가지 키워드로 정리하고 설명했다)
우리는 이미 AI 기술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가상 인간이 출연하는 광고를 TV를 통해 만나고 있으며, 많은 SNS 팔로워를 보유한 가상 인간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사회에 살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자영업자를 도와 손님의 예약 전화를 대신 받아주고, 돌봄과 관심이 필요한 독거노인을 위해 안부 전화를 걸어주는 사회복지사 역할까지 대체하고 있다. 게다가 AI 기술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적 공간을 확장하고 있다. 예를 들어, AI 소사이어티의 시민들은 메타버스 공간으로 출근하고 새로운 친구를 만들기 시작했다. 메타버스라는 가상공간으로 확장된 사회에서 AI의 역할은 더 중요해질 것이다. 새로운 사회적 공간에서 AI는 10년 전 영화에서 보던 사람 말을 곧잘 이해하고 소통하던 로봇이나 운영체제의 모습이 아니다. 인공지능에 대한 이질감은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으며, 이제 우리는 이들과 더 깊이 연결(wired)되고 협업(with)하는 확장(widen)된 사회에 살게 되었다.
따라서 AI 소사이어티에서 인공지능에 위로받고, 교감하는 모습은 매우 흔한 일상이 될 것이다. 특히 코로나 19로 인해 외부활동이 제한되면서 AI 기반의 가상 데이트 앱을 통해 인공지능과 데이트를 즐기는 이들을 흔히 볼 수 있게 되었다. 단순히 연애뿐만 아니라 AI 돌봄 서비스를 통해 많은 어르신이 외로움을 덜어내고 실질적인 도움과 ‘사랑’을 받고 있기도 하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고유 영역이라 생각했던 공감과 포용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AI 소사이어티에서 우리는 인간과 인공지능의 사랑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영화 <그녀>에서 인공지능을 사랑하게 된 주인공 테오도르는 인공지능 운영체제인 사만다에게 ‘난 다른 누구도 당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한 적이 없어’라는 고백을 하는데, 이 고백에 대해 사만다는 ‘이제 사랑하는 법을 알게 된 거겠죠’라고 대답한다. 즉, 주인공은 AI와의 사랑을 통해 한층 더 성숙한 사랑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AI 소사이어티에서는 우리 인간이 AI를 사랑하게 되는 일이 빈번하게 나타날 것이며, 그러한 사랑을 통해 다른 인간과 더 성숙한 사랑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긍정적인 면만 기대할 수는 없다. 이미 AI소사이어티가 도래한 상황에서 우리는 단순히 인공지능과 사랑에 빠진 상황에 대한 고민뿐만 아니라, 인간이 인공지능과 결혼을 하고 아이를 입양하는 등의 인공지능과의 사랑이 야기할 실질적인 사회적 문제까지 고민해봐야 한다. 영국의 AI 전문가 데이비드 레비(David Levy)는 2021년 07월 ‘데일리스타(daily star)’와의 인터뷰에서 2100년쯤이면 로봇과의 결혼까지 고려하는 사람들도 나타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사회적 현상이 보편화 될 때, 우리는 생존, 자유, 평등 등 인류의 핵심 가치들이 위협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두려워한다. 시험관 아기가 탄생했을 때, 인터넷이 처음 발명되었을 때, 우리는 새로운 기술이 가져올 긍정적인 모습보다 부정적인 모습에 초점을 맞추고 두려워했다. 이제는 전기처럼 보편화한 AI 기술을 인류의 핵심 가치를 지켜나가며 키워나가는데 사용될 수 있도록 사회적 담론을 만들어나가야 할 때이다.
당부하고 싶은 말은 AI가 바꾸는 세상이 낯설더라도 망설임 없이 포용하라는 것이다. AI라는 기술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AI 기반 서비스와 제품들을 적극적으로 체험하며, AI가 선사하는 삶의 풍요를 누렸으면 한다. 불편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혁신적인 기술이 일으킨 사회의 변화는 개인에게 적응을 요구할 뿐 거스를 수 있는 선택권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구사회에서 신사회로 넘어가는 시기에는 기술을 포용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간의 뚜렷한 경계선이 그어진다. 정보 사회에서 인터넷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같은 땅 위에 발을 붙이고 살면서도 속한 세상이 다르다는 것만 봐도 자명한 일이다. 인터넷에 익숙한 이들은 인터넷 뱅킹, KTX앱, 쿠팡, 카카오택시 등 서비스의 혜택을 일상적으로 누리며 살지만, 인터넷을 거부한 사람들은 아직도 은행, 기차역, 마트, 택시 승강장에 줄을 선다. 모든 사람이 같은 세상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커다란 착각이다.
‘사람보다 똑똑한 기계는 인류를 멸망시키는 인류의 마지막 발명품이 될 것이다.’라는 경고에 떨며, ‘AI 안티’를 자처할수록 세상과 당신의 격차만 벌어질 뿐이다. ‘AI와 인간의 사랑’을 포함한 당신의 마음에 품고 있는 AI에 대한 우려와 공포는 AI소사이어티에서 ‘AI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일에 나서는 동력으로 삼으면 된다.
IBM, 하나금융 융합기술원 등을 거쳐 현재는 외국계 소비재 회사에서 시니어 데이터 과학자로 근무하고 있다. 베이징대학교 졸업 후 캘리포니아대학교 샌디에이고 캠퍼스(UCSD)에서 국제경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AI 소사이어티」, 「퀀트 전략을 위한 인공지능 트레이딩」이 있으며, 역서로는 「단단한 머신러닝」, 「데이터 과학자와 데이터 엔지니어를 위한 인터뷰 문답집」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