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추억의 빨강머리 앤이 요즘 다시 주목받고 있습니다. 역시 명작은 세월을 초월하는 것 같은데요. 실은 이 빨강머리 앤의 이야기 속에서 부실채권, 자산매각 등 경제 금융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는 거 아시나요?
글. 박병률 <경향신문> 기자
어린 시절 추억의 빨강머리 앤이 요즘 다시 주목받고 있습니다. 역시 명작은 세월을 초월하는 것 같은데요. 실은 이 빨강머리 앤의 이야기 속에서 부실채권, 자산매각 등 경제 금융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는 거 아시나요?
글. 박병률 <경향신문> 기자
“그 아름다운 곳을 가로수 길이라고 불러선 안 돼요. 그런 이름에는 아무 뜻이 없으니까요. ‘기쁨 가득 새하얀 길’ 어때요? 새롭고 멋진 이름 아닌가요? 저는요, 어떤 장소나 사람의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항상 새로운 이름을 상상해서 그들을 그 이름으로 생각했어요.”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강머리 앤을 소개합니다
캐나다 프린스 에드워드섬 에이번리. 초록지붕 집 아래 사는 한 소녀는 수다스럽지만, 시적 상상력이 넘쳐난다. 얼굴은 주근깨투성이고, 빨강머리를 땋아 내린, 빼빼 마른 여자아이, 그 아이의 이름은 앤이다. 단 스펠링이 ‘ANN’이 아니라 E를 붙인 ‘ANNE’이라는 점.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캐나다가 사랑하는 대표 캐릭터다. 여류소설가인 루시 모드 몽고메리는 1908년 <빨강머리 앤(Anne of Green Gables)>을 첫 집필했다. 그러니까 벌써 100년도 더 된 이야기다. <빨강머리 앤>이 친숙해진 데는 애니메이션의 역할이 컸다. 1979년 제작된 다카하타 아사오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 연출의 아니메 <빨강머리 앤>은 1980년대 중반 국내에 방영되면서 널리 알려졌다. 흩날리는 벚꽃 사이로 마차를 탄 앤이 환하게 웃는 장면을 여전히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연출진들은 아니메 제작을 위해 직접 프린스 에드워드섬까지 갔다고 한다. 그곳에서 머물며 직접 섬의 풍광을 기록했다. 화면이 매혹적이었던 것이 다 이유가 있다.
2030 세대에게는 시즌 3까지 나온 넷플릭스의 <빨강머리 앤(Anne with an "E")> 오리지널이 더 친숙하다. 이야기 흐름이 원작에서 다소 벗어나지만 1900년 초반 캐나다 소년소녀들의 모습과 프린스 에드워드섬의 풍광이 잘 살아있다. 캐나다 CBC 텔레비전이 2017~2019년 제작해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넷플릭스와 결별한 뒤 아직까지 시즌4 제작 소식은 없다.
앤은 저자의 자전적 캐릭터다. 앤이 살았던 프린스 에드워드섬은 작가의 고향. 그녀도 어릴 때 상상력이 풍부한 소녀였고, 두 살 때 어머니를 여읜 뒤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 밑에서 컸다. 그리고 교사가 됐다. 외할아버지의 농가는 앤의 집 배경이 됐다. <빨강머리 앤>은 전체 22편에 이르는 장편소설이다. 그중에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것은 1편이다. 속편으로 <앤의 청춘> <앤의 행복> <앤의 꿈의 집> 등이 있다. 앤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그 아이가 장성하기까지 이야기는 이어진다.
고집불통, 상상력 대마왕 소녀의 성장기
앤의 스토리는 ‘실수’에서 시작된다. 입양은 착오였다. 에이번리의 초록지붕 집에 사는 독신 남매 매튜와 마릴라는 남자 고아를 찾았다. 자신들의 일을 도와줄 인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실수로 앤이 입양됐다. 앤을 되돌려 보내려 했던 매튜 남매. 하지만 앤의 어려웠던 과거를 듣고는 마음을 고쳐먹는다. 무엇보다 앤의 발랄함과 순수함, 엉뚱함은 적막했던 남매에게 활기를 준다. 앤은 인근 비탈길 과수원 집 딸인 다이애나와 ‘절친’이 된다. 고아라는 딱지가 붙어 있지만 앤은 진실함과 솔직함으로 편견에 빠진 어른들을 하나씩 설득해나간다.
앤은 빨강머리에 빼빼 말랐다는 콤플렉스가 있다.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에는 가차 없다. 학교 친구인 길버트 블라이드가 앤에게 ‘홍당무’라고 한번 놀렸다고 해서 5년이 넘도록 대화하지 않는, 고집불통이다.
앤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에이번리의 아름다운 숲과 시내, 하늘은 앤의 상상력에 날개를 달아준다. 앤의 장기는 ‘이름 붙이기’다. 사물과 대화하는 상상놀이를 하는 데 ‘이름’이 필요했다. 수십 년 전 한 농부가 사과나무를 심어 아치를 이룬 400~500미터의 길은 ‘기쁨 가득 새하얀 길’이라 이름 붙였다. 새하얀 사과꽃으로 뒤덮였기 때문이다. 다이애나의 아버지, 배리 씨네 연못은 ‘반짝반짝 호수’다. 앤의 농장과 다이애나네 농장 사이 하얀 자작나무들이 에워싼 동그란 땅은 ‘한가로운 황무지’다. 앤은 이 이름을 짓는 데 거의 하룻밤을 꼬박 새웠고, 막 잠이 들려고 할 때 영감처럼 떠올렸다. 배리시네 풀바위에 있는 작고 동그란 연못은 ‘버드나무 연못’이다. 그 이름은 다이애나가 빌려준 책에서 힌트를 얻었다. 버드나무 연못을 지나 벨 씨네 큰 숲의 그늘진 곳에 움푹 팬, 제비꽃이 엄청나게 피는 곳은 ‘제비꽃 골짜기’다. ‘유령의 숲’도 있다. 시내 건너 가문비나무 숲이다. 다이애나랑 앤은 숲에서 유령이 나온다고 그냥 상상했다. 가문비나무 숲을 고른 건 그곳이 음침하기 때문이다.
끝에 ‘e’를 붙여주세요!
이런 앤이 자신의 이름에 집착을 하지 않을 리 있나. 앤은 마릴라 아줌마에게 말한다. “정확하게 말해서 제 이름은 아니지만 코델리아라고 불러주셨으면 좋겠어요. 정말 흠잡을 데 없이 우아한 이름이니까요.” 마릴라 아주머니가 거부하자 다른 제안을 한다. “끝내 저를 앤으로 부르셔야 한다면 끝에 ‘e’가 있는 앤으로 불러주세요. 앤(A-N-N)은 끔찍하지만 앤(A-N-N-E)은 훨씬 품위 있어 보여요.”
앤은 특유의 관찰력과 집요함에 길버트와의 경쟁까지 더해지자 학교 성적이 쑥쑥 오른다. 앤은 퀸스 학교를 길버트와 함께 공동 수석으로 입학한다. 졸업 때는 레드먼드대학의 4년 장학금까지 받는다. 거기서 국문학을 공부할 꿈을 키우지만 돌연 꿈을 접어야 하는 일이 생긴다. 매튜 아저씨가 심장마비로 사망한 것이다. 앤은 시력을 잃어가는 마릴라 아줌마를 그냥 둘 수 없었다.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초록지붕 집에 남기로 한다.
앤이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초록지붕 집에 남게 된 까닭은?
앤이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초록지붕 집에 남게 된 까닭은?
매튜 아저씨는 왜 갑자기 사망하게 됐을까. 해피엔딩으로 끝날 것 같던 앤의 미래에 불확실성이 커진 것에는 ‘경제적 이유’가 있다. 매튜 아저씨는 애비은행이 파산했다는 소식을 들은 뒤 그 충격으로 사망한다. 매튜 아저씨는 애비은행에 자신이 가진 돈 모두를 넣어뒀다. 애비은행의 대표인 애비 씨가 매튜 남매의 아버지와 막역한 친구였기 때문이다. 마릴라 아주머니는 앤에게 “난 처음에 저축은행에 넣자고 했는데 매튜 아저씨는 내 말을 듣지 않았어”라고 걱정한다. 앤도 근심 가득한 얼굴로 우려한다. “제 생각에 그분이 몇 년간 명목상으로만 대표였던 것 같아요. 나이가 많아서 조카가 실질적인 대표였대요”.
어른을 위한 동화 같은 <빨강머리 앤>에 왜 ‘은행파산’이라는 경제사건이 나왔을까? 당시 사회상황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몽고메리가 <빨강머리 앤>을 한창 집필하던 1907년 세계적인 대공항이 발생했다. 미국에서 300개의 금융기관이 문을 닫았고 2만 개의 기업이 사라졌다. 1907년 대공황의 원인은 은행들의 무리한 대출이었다. 당시 미국 은행들은 지급준비율은 1%도 되지 않았다. 고객이 100달러의 돈을 맡기면 1달러 정도만 은행에 남겨 놓고 나머지는 모두 대출해줬다. 대공황 전 미국은 초호황을 누렸다. 1900년대 초부터 이어진 철도산업과 철광산업의 호황으로 미국의 산업생산지수는 최고치를 기록했다. 기업들은 잇달아 투자를 나섰고, 은행들은 마구잡이로 돈을 빌려줬다. 시중에 풀린 돈들은 주식시장으로도 몰려 주가가 치솟았다.
버블은 곧 꺼지기 마련인 법
은행이나 투자자로부터 돈을 빌려 증시와 기업채권에 투자하는 투신사들도 등장했다. 하지만 버블은 오래가지 못했다. 1907년 하반기가 되자 주식시장에는 암울한 루머들이 퍼지기 시작했다. 세 번째로 큰 투신사인 니커보커트러스트(Knickerbocker Trust)가 곧 파산할 수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 같은 루머가 뉴욕 전역에 퍼지면서 투자자들이 일제히 투자자금 회수에 나섰다. 은행들도 돈을 빌려준 투신사에 자금상환을 요구했다. 갑작스런 상환요구에 투신사들이 급전을 빌리다 보니 금리가 급증했다. 은행에 돈을 맡긴 예금자들은 은행으로 몰려가 인출에 나섰다. 지급준비를 위해 가진 돈이 별로 없었던 은행은 약간의 뱅크런도 버틸 수 없었다. 주가는 1년 만에 반 토막이 났다. 미국 금융기관과 가까운 캐나다도 예외는 아니었다.
소설 속에 보면 매튜 아저씨는 지인인 러셀 씨에 자문을 구한다. 러셀 씨는 “애비은행이 큰 규모의 융자금 회수가 곤란해 져서 일시적으로 위기에 직면했지만 큰 은행이 지원하기로 했다”며 안심시킨다. 당시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eral Reserve Board)와 같은 중앙은행도 없던 시절이었다. 애비은행은 끝내 회생하지 못했다.
만약 앤의 곁에 캠코가 있었다면?
만약 앤의 곁에 캠코가 있었다면?
기업이 위기에 빠질 때 구원자로 나서는 대표적인 공공기관이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다. 캠코는 위기 시 시장에서 외면당하는 부실채권을 인수해 해당기업이 회생하도록 돕는다. 기업이 대출을 상환할 시간을 벌어줘 구조조정이나 인수합병 등을 통해 경쟁력을 다시 회복할 기회를 준다는 의미다. 이 같은 조치는 시장의 급격한 붕괴를 막아 산업계와 금융계의 안정시키는 데도 큰 역할을 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1997년 외환위기다. 캠코는 1997년 외환위기 당시 39조 2,000억원의 공적자금을 투입해 금융기관에서 발생한 111조 원어치의 부실채권을 인수해 정리했다. 2008년 말 저축은행 사태 때도 1조 7,000억원의 PF대출 부실채권을 인수해 금융권 전반으로 부실이 확산되는 것을 막았다. 금융위기가 한창이던 2009년 5월에는 구조조정기금을 설립해 8조 5,000억원에 이르는 금융권과 기업의 부실자산을 인수해 정리했다.
캠코와 함께 해피엔딩을 꿈꾸다
캠코와 함께 해피엔딩을 꿈꾸다
1908년 캐나다에는 캠코와 같은 기관이 없었다. 은행이 대출해준 채권이 부실화됐을 때 이를 받아줄 곳이 없다면 은행은 곧바로 유동성 위기에 닥친다. 예금자가 예금인출을 요구해도 줄 돈이 없기 때문이다. 예금지급을 하지 못하는 캐나다의 은행들은 곧바로 파산했다. 마땅한 예금자보호 장치마저 없던 시절이라 예금자들은 자신이 예금한 돈을 돌려받기도 거의 불가능했다. 전 재산을 잃게 된 매튜 아저씨가 받았을 충격은 짐작할 만하다.
만약 캠코가 있었다면 루시 모드 몽고메리는 <빨강머리앤>을 어떻게 끝맺었을까? ‘애비은행이 회생하면서 매튜 아저씨는 웃음을 되찾았다. 앤은 매튜 아저씨를 마릴라 아줌마에게 맡기고 레드먼드 대학으로 진학했다’라고 끝났을 수도 있다. 그랬다면 앤의 미래도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글. 박병률 <경향신문> 기자 <경향신문> 경제부 차장으로 경제에 대한 눈높이를 낮추기 위해 영화, 문학, 대중문화와 경제학을 접목하는 다양한 작업을 해오고 있다. 저서로 <경제학자의 문학살롱>, <영화 속 경제학>, <아이언맨 수트는 얼마에 살 수 있을까?>, <경제를 모르는 그대에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