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밀밭의 파수꾼, 새출발기금
글. 박정민 (서울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코로나19의 여파, 그리고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의 부실위험
“재난의 충격은 평등하지 않다
코로나19로 인해 우리 사회가 겪은 인명피해와 사회경제적 손실은 막대하다. 재난의 충격은 평등하지 않아서 유난히 크게 영향을 받은 집단들이 있다. 바로 자영업자와 소상공인들이다. 수많은 자영업자와 소상공인들이 지난 2년 간 사회적 거리두기에 따라 영업이 위축되고 방역을 위한 영업제한에 협조하면서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매출이 줄고 자금사정이 어려워지는 상황을 빚으로 대응하면서 대출이 크게 늘고 원리금 상환부담이 커졌다.

부실의 조짐은 뚜렷하다.
소상공인과 자영업자의 대부분이 개인사업자인데 지난 2년 반 동안 개인사업자 대출은 사회문제로 등장한 가계대출보다 2배나 빠르게 늘었다. 특히 이자율이 높고 상환부담이 더 큰 비은행권 대출이 크게 증가하였고, 3개 이상의 금융기관에서 대출을 받은 다중채무자는 3배 이상 증가하였다. 은행대출에서 시작하여 저축은행을 포함한 제2금융권 대출, 정부지원정책금융, 대부업체, 카드론, 일수대출로 이어지기도 한다. 불어나는 대출에 따른 상환부담의 증가는 빚으로 빚을 갚는 돌려막기, 제때 갚지 못하는 연체로 이어지고, 결국 상환불능에 따른 파산과 경제적 몰락의 위험을 높인다.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의 재정 상황이 악화되어 왔지만 그들의 부실 규모는 아직까지 수면 아래 잠겨 있는 상태이다. 정부와 금융기관이 대출만기연장, 상환유예, 손실보전금 제공, 저리대출정책 등을 제공하면서 위기 대응을 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기회복은 지체되고 물가상승에 따른 비용부담은 증가하고 있는데, 금융권의 상환유예 조치는 곧 끝나고, 금리는 급상승하고 있다. 부실위험이 심화되고 확대될 가능성이 점점 커지는 형국이다.
자영업자와 소상공인
경제와 가계의 근간
전체 사업체 수의 85%, 고용의
절반 가까이를 담당하는 소상공인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은 흔히 우리 경제의 근간이라 불린다. 전체취업자 중 자영업자의 비중은 약 20%이다. 이는 미국(6.3%), 일본(10.0%), 영국(15.3%) 등 경제 규모가 큰 주요 국가들과 비교하여 월등히 높은 비율이다. 상시 근로자 5-10인 미만인 소상공인은 전체 사업체수의 약 85%를 차지하고 전체 고용의 절반 가까이를 담당한다. 이들은 가계경제의 근간이기도 하다.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이 겪는 재정적 곤란과 부채상환 부담의 상승은 그들 가구 구성원의 삶의 질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높다. 부채상환 부담이 높은 과중채무집단은 일반인구 집단은 물론 저소득 집단에 비해서도 생계, 고용, 주거, 건강, 사회적 관계 차원에서 측정한 사회경제적 박탈 수준이 높다고 보고된 바 있다.
헨리크 입센의 1879년작인 희곡 <인형의 집>에서 노라는 가족을 위해
아무도 모르게 고리대금업자로부터 빚을 진다.
그 후 전전긍긍하는 그녀의 모습은 채무자의 고통을 잘 묘사한다.
헨리크 입센의 1879년작인
희곡 <인형의 집>에서 노라는 가족을 위
해 아무도 모르게 고리대금업자로부터
빚을 진다. 그 후 전전긍긍하는 그녀의
모습은 채무자의 고통을 잘 묘사한다.
필자는 작년과 올해에 걸쳐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의 빚을 가진 채무자들과 채무조정 후 변제의무를 마친 완제자 30명을 심층인터뷰하였다. 채무자의 현실은 작은 규모로 시작했지만 빠져나오기 어려운 늪이 되어 버린 빚과 수시로 오는 상환 독촉의 문자와 전화 속에서 탈출구가 없는 막다른 길로 표현되었다. 가족과의 다툼과 갈등이 잦았고 친구와의 관계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대부분 단절되었다.

좌절감과 고립감 속에서 우울증, 불면증, 공황장애를 겪고 갑상선 질환과 암 등의 질병이 생겼으며 심지어 극단적인 선택까지 생각하였다. 막다른 길에서 만난 채무조정이나 신용회복제도는 빚 독촉에서 비롯된 중압감과 극심한 스트레스를 덜어주었고 죽음을 생각할 정도로 어려운 상황에 처한 이들을 다시 살게 해준 길이었다. 법원에서 개인파산을 신청하고 승인을 받은 집단과 받지 못한 집단을 비교한 또 다른 연구에서도 채무조정을 받은 집단은 삶의 질이 뚜렷이 개선됨을 볼 수 있었다.
새출발기금의 특징
채무 탕감에 따르는 도덕적 해이 최소화,
형평성과 실행의 안정성 확보
빚을 갚는데 어려움을 겪는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의 상환부담 완화를 위한 ‘새출발기금’이 곧 시행될 예정이다. 저소득·저신용 금융취약층의 상환부담을 줄여 경제적 재기를 돕기 위한 채무자지원 정책은 지난 20년 간 모든 정부에서 실시하였다. 노무현 정부는 한마음금융과 희망모아, 이명박 정부는 신용회복기금, 박근혜 정부는 국민행복기금, 문재인 정부는 장기소액연체자 지원을 통해 자력으로 상환이 어려운 채무자의 원금과 이자를 감면해주고 남은 채무를 갚게 하는 채무조정을 실시하였다.

새출발기금은 상환능력에 부합하게 채무를 변제할 수 있게 함으로써 수혜자들이 도태되지 않고 경제적 새출발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이전 제도들과 목표를 공유한다. 한편 코로나19로 피해를 입은 자영업자와 소상공인 전용 채무지원 정책이라는 점은 이전과 다르다. 채무지원 정책에 늘 뒤따르는 도덕적 해이 논란을 최소화하기 위한 장치도 여럿 눈에 띈다. 부채보다 자산이 많으면 원금조정 대상에서 제외하고, 반복 신청을 제한하기 위해 신청횟수를 1회로 제한하며, 자산형성 목적의 대출이나 채무조정 신청을 목적으로 한 신규대출을 제외하는 규정 등이다. 채무조정한도나 부실 수준에 따라 원금 감면, 이자 감면, 이자율 조정, 분할상환, 상환유예 등을 적용하는 지원내용은 오랫동안 실시된 신용회복위원회의 개인채무자지원제도와 유사하여 형평성과 실행의 안정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새출발기금의 의의,
막다른 길 앞에서
살게 해준 길
어려운 이들을 위해 절벽 끝을 지키는
호밀밭의 파수꾼
아주 오랫동안 채무와 낙인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았다. 빚을 지는 것은 꺼려지고 부끄러운 것이고, 빚을 갚지 못하는 것은 범죄로 여겨지거나 사회 규칙을 일탈하는 것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현대사회에서 채무는 구매력을 유지하고 사업이나 교육 등 미래를 위해 투자하는 수단으로 광범위하게 이용된다. 이런 상황에서 실업이나 전염병으로 인한 영업제한, 장애나 질병과 산업재해 등 예기치 않은 역경이 발생하면 소득상실이나 지출증가와 같은 충격이 발생하면서 채무는 늘고 상환은 어려워지는 결과로 이어진다. 사회구성원 다수가 이로부터 자유롭지 않으므로 과중채무의 이슈는 개인의 문제로만 치부하기보다 사회적 대응이 요구되는 측면이 있다.
새출발기금으로 지원을 받게 될 채무자는 최대 40만 명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이 지원은 수혜자가 경제적 새출발을 하고 적극적인 경제활동 주체로 계속 활동하도록 도울 뿐 아니라 당사자는 물론 그 가족의 안녕에도 기여함으로써 그 비용보다 큰 사회적 이익을 창출할 것이 기대된다.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의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은 늘 넓은 호밀밭에서 아이들이 재미있게 놀고 있고 자신은 그저 아득한 절벽 옆에 서 있다가 마구 달리던 아이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일을 하는 것에 대한 상상을 이야기한다. 곧 시행될 새출발기금과 이미 실행되고 있는 신용회복제도는 그 이야기 속 호밀밭의 파수꾼 같은 제도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