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사업실패,
시작된 생활고


17년 긴 세월을 어둠 속에서 마음 편하지 않게 살아온 시간을 기억합니다.
긴 터널 같은 시간을 지나 희망의 빛에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자 이 글을 적어봅니다.
아들, 딸 낳아 한 가정을 꾸려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애들 아빠 사업이 하루아침에 망하는 바람에 집, 사무실, 모든게 엉망으로 변해버렸습니다. 죽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많이 했습니다. 순간순간을 버텨내기 힘들었지만, 어린 자식들 보면서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다시 한 번 살아봐야겠다고 말이지요. 그래도 힘든 생활은 반복되었습니다.

이 많은 빚을 어떻게 다 갚아야 하나?

빚쟁이들이 찾아오고 법원에서 우편물이 날아오고 주소를 여기저기 옮겨야만 했습니다. 눈물과 하루를 보내는 게 일과가 되어 버렸습니다.
급기야 이혼까지 당하니 하루하루 사는 게 너무 억울했습니다. 신랑이 너무 미워서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신랑이 각 은행은 물론, 신용카드까지 돈 되는 건 허락 없이 모두 대출을 받았기에 이혼 이후의 나는 신용불량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어떻게 이 많은 돈을 내 허락도 없이 전부 다 빌려 쓸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내가 모르는 빚을 갚으라는 우편물이 날아오는 것은 공포감을 주었고, 내가 모르는 보증을 섰다는 내용에 기절할 것 같았습니다.
상대방한테 ‘내가 보증 선 사실도 몰랐다. 돈을 못 갚겠다’고 말하며 싸우기도 했습니다. 한 푼 써 보지도 않은 빚을 갚아야 하니 얼마나 억울하고 분통하던지요. 파산 신고를 하려고 찾아봤지만, 그마저도 돈 몇 백이 있어야 했습니다. 식당일로 하루 벌어 하루 쓰기도 바쁜데 그만한 목돈이 있을 리 없어 파산신청조차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이혼 후의 신랑은 어디로 도망가 버리고 나 홀로 어린애들을 데리고 이 집 저 집을 떠돌아다녔습니다. 참으로 눈물로 보낸 시간이었습니다. 방 한 칸에 중3 아들이랑, 고2 딸이랑 셋이서 살았습니다.

절망 속
유일한 희망이었던 ‘아이들’


칼날처럼 추운 겨울의 어느 날, 고3 졸업을 앞둔 아들이 아침 5시 반에 일어나 안전모를 쓰고 작업복을 입고 막노동하러 나가면서 이렇게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

엄마, 내 용돈이랑 대학등록금은 내가 벌어서 갈 테니까, 걱정하지 마

라고 하던 아들 말에 얼마나 눈물이 나던지요. 이 글을 적는 지금도 그 말이 가슴에 맺혀 있는 듯합니다. 너무너무 마음이 아프네요. 그러곤 아들은 21살 때 군에 갔습니다. 군에서도 일주일 휴가 나오면 쉬지도 않고 부산으로 가 돌 깨는 일당 7만 원짜리 막노동을 했습니다.

딸은 학원 한 번 다니지도 못했는데 스스로 공부해 반에서 1, 2등을 하곤 했습니다. 밤늦게까지 아르바이트를 한 돈으로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엄마 미역국을 끓여주기도 했습니다. 용돈 한 번 받지 못하는 어려운 환경인데도 꿋꿋이 열심히 생활하고 공부하는 아이들이 정말 대견스러웠습니다. 그 시절이 참 눈물이 납니다.
어느 날 식당에서 일하다가 다리를 다쳐 며칠 집에서 쉬고 있는데, 남자 한 분이 돈 갚아야 한다고 찾아온 적 있습니다. 울면서 그분한테 사정 이야기를 하니까 우리 형편을 보고 그냥 돌아간 기억이 납니다.
힘든 세월 눈물로 하루하루를 보낸 시간이 얼마나 가슴이 아픈지, 잠자는 시간이 제일 행복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잠잘 때는 잠시나마 아무 걱정 없이 있을 수 있으니까요. 때론 이대로 눈 뜨지 않고 저승으로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많이 하고 살았습니다. 그래도 애들 자는 얼굴 쳐다보면 정말 미안해서 마음을 다잡곤 했습니다.
대구에 일자리를 알아보려고 갔던 적이 있습니다. 서부 정류장에서 배가 너무 고팠지만 2,500원짜리 우동 하나 사 먹는 게 너무 아까워 교회에 들어가 수돗물을 틀어서 마신 적도 있습니다. 참... 대구 생활하면서 많이 힘들었습니다. 이 집 저 집 식당 일을 다니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긴 세월이 그렇게 지났습니다.

어느 날 걸려온
한 통의 전화


그러다 작년에 캠코라는 곳에서 한 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 전에 전화 오는 걸 전혀 받지 않다가 법원에서 또다시 친정엄마 집으로 우편물이 날아오는 바람에 캠코와 통화를 하게 된 것입니다. 담당자는 빚을 다 안 갚고 90% 감면을 받을 수 있으며 빚을 갚을 방법을 안내해 주었습니다.

처음엔 솔직히 사기인 줄 알았습니다. 신용회복제도가 만들어져 그 기간 안에 신청하면 신용불량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했는데, 나는 아무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돈을 뜯어내려고 이상한 소리를 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꼼꼼하게 하나씩 다시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런 제도가 있다는 것 알게 됐고 캠코에 다시 전화해, 그쪽이 알려주는 대로 서류를 준비해서 창원에 있는 캠코 경남지역본부에 접수했습니다.
신청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진짜 90% 감면대상이 되었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많은 빚을 감면받고 법률처리 비용을 합해 152만 240원만 갚으면 된다고 했습니다. 그 비용도 여의치 않아 할부로 하면 안 되냐고 물어보니까 현금으로 하면 10% 할인해 준다는 답을 들었습니다. 아들 딸이 보태 주어 현금으로 다 해결하고 나는 신용불량에서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장기소액연체자
지원제도 덕분에
다시 시작된 ‘새 삶’


17년 긴 세월에서 벗어난 것 같아 그날은 잠을 못 이룰 정도로 기분이 좋았습니다. 세상에 살다가 이런 일도 있구나. 나라에서 이런 제도를 만들어 신용불량자들 구해주는가 싶어 캠코에 전화해 대통령께 감사하고 캠코 담당자 분께도 감사하다고 몇 번이나 인사를 했습니다.

이자에 이자가 늘어나 5~6천만 원 넘게 갚으라는 용지가 날아오곤 하더니만 더 이상 용지가 오지 않았습니다. 또 시중 금융회사에 550만 원 채무 있는 것도 면제 신청했는데 몇 달이 지난 8월 9일, 면제 판정되었다는 문자도 왔습니다. 모든 빚이 다 해결되고 나니까, 너무너무 감사한 마음이 생겨 일을 아무리 해도 전혀 피곤하지 않았습니다.
목숨까지 버리고 싶은 시간이 참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다시 희망의 빛을 찾을 수 있는 삶의 터전을 만들어 주어 정말 감사합니다. 고마움을 잊지 않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신용불량에서 벗어나 이렇게 보장된 삶의 하루를 살 수 있게끔 만들어 주어 죽을 때까지 감사합니다. 수기 공모전이 있다는 문자를 보고 내가 지나온 삶 있는 그대로 적어서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자 이 글을 보냅니다. 죽은 목숨 다시 살려주시어 정말 고맙고, 감사합니다. 하루하루 보람된 삶을 더 열심히 살라고 이런 제도를 만들어 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힘든 세월 자식들과 겪어오면서 숨이 막힐 정도로 마음과 몸이 아팠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루하루 얼굴에 웃음이 가득한 엄마 모습 보면서 애들이 더 좋아하네요. 그래서 항상 봉사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생활에 마음의 여유가 있다는 게 너무 행복합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